I remember meeting U here in the good ol' days



1. 턴테이블 + LP

최근 2년 동안 가장 공들여 구축한 시스템이 바로 턴테이블과 LP 조합이다.

이 조합의 가장 큰 장점은 나로 하여금 딴청을 피우지 않고 음악을 완전히 귀기울여 들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1분도 집중하지 못하는 핸드폰과 SNS의 시대에서 최소한 20여분 이상 무언가에게 나의 정신을 할애한다는 것은 보통의 애정으론 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20여분 정도 플레이된 LP의 한쪽 면이 모두 플레이 되고나면 마치 대단한 미션이라도 수행하는 듯이 판을 뒤집어 올려놓을 때 내가 제법 멋있게 음악을 듣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우쭐함이 들기도 한다. (이 우쭐함 마저 없으면 나같은 귀차니스트가 어떻게 앨범 한장을 듣기 위해 2~3번 판을 뒤집는 행동을 하는 것이 설명될 것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엘피를 듣던 시절에 만들었던 앨범들은 분명 엘피가 가질수 밖에 없었던 기술적 한계를 감안하여 곡의 순서, 시간, AB면 배치등에 신경 썼을 것이다. 퍼플레인을 엘피로 처음 플레이했을 때야 비로소 5번 트렉인 “달링니키”가 A면의 피날레이고, 6번 트렉인 “비둘기울적에”가 B면의 시작임을 느끼게 되었다. 9곡이 수록된 퍼플레인이 “5곡 + 4곡”으로 새롭게 인수분해 되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작은 변화 하나가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하게 되고 듣지 않던 음악까지 듣게 만드는 힘이 생기기도 한다.

덕후는 원래 섬세하니까 (물론 씹덕후는 10배 더 섬세하고..)

2. CD Player + CD

사실 내가 음악에 가장 의존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휴대용” CD PLAYER에 내 음악의 전부를 의존했었다. 그러다가 아이팟과 mp3의 시대가 도래하자 시디는 귀찮은데다가 더 이상 “모으고 싶지 않은 플라스틱 시대의 작고 하찮은 것”으로 인식되어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매체였다.

하지만 mp3 player에는 아무리 앨범 단위로 노래를 넣어봤자 앨범 단위로 노래를 듣지 않게 된다. 전곡 랜덤 재생, 플레이리스트 재생 등 몇몇 편리한 기능은 진득하게 음악을 앨범 단위로 듣는 습성을 파괴 해버린다.

아무리 좋은 노래와 명반으로 mp3 player를 채워놓아도 랜덤 재생을 하는 순간 멜론 챠트와 다를바가 없어서 처음 10초간 자극적인 멜로디가 나오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다음곡 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출발비디오여행의 영화대영화 하이라이트가 아닌, 진짜 영화를 FULL로 감상하기 위해... 아티스트가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처럼 만들어놓은 앨범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 나는 다시 네모난 시디케이스를 열어 (노엘갤러거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동그란 시디를 시디 트레이에 밀어넣는다.

그리고 1번 트렉부터 순차적 재생

앞의 엘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90년대 이후 시디의 세대에 발매된 앨범들은 최대한 이렇게 감상하려고 한다.

게다가 시디는 뒤집는 수고를 덜 수 있어서 매우 편하고 좋다. 사실 이 말은 시디가 처음 나왔을 때 엘피를 듣던 사람들이 했었던 말일테지?! 나는 왜 사라들이 이미 사용하지도 않는 기기에다가 대고 편리하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걸까?

3. 아이폰 + 자동차

난 원래 운전을 하기 싫었다. 나같은 사람은 필시 운전을 못할 거라 확신했다. 그런 생각으로 면허를 따고 10년 가까이 차를 가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아주 오래된 자동차가 생기고 난 후, 그리고 차 안에서 음악을 듣기 시작한 후 리스너로써의 나의 경험은 완전히 달라졌다.

(좋은 음악과 함께라면) 난 아무리 오래 운전을 해도 별로 지치지 않는다. 따라서 난 시내에서 길이 막힐 때면 오히려 반기기도 한다. 주로 짧은 거리를 운전하는 탓에 막히지 않으면 노래 3~4곡 정도만 듣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더불어 “볼륨을 최대한 높일 수 있다는 것과 눈치 보지 크게 따라부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즐거움이다.

4. 스피커독 + 판도라 라디오

나는 들었던 것을 계속 반복해서 듣는다.

지겹지 않냐고? 물론 지겹다.

그래서 그 모든 지겨운 과정을 이겨내고 내게 남은 음악들을 더더욱 소중하게 여긴다. 프린스, 데이빗보위, 레너드코헨 그리고 조니미첼 등등

그들의 음악이 내게 있어서 밥과 김치다. (아마 이들의 음악이 메르스 면역력을 높여주는게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들의 깊고 넓은 스펙트럼이 나를 “맨날 듣는 것만 듣는 놈”으로 만들어 버린다. 근데 사실 그 안에 얼마나 다양한게 있는데...

프린스 안에 여러 아티스트 (제임스브라운, 슬라이스톤, 조지클링턴, 산타나 등등)가 들어있듯이 프린스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프린스의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 (예를 들어 Terence Trent D’arby, D’angelo, Maxwell 등)를 찾기 위해 나는 판도라 라디오를 켠다.

예시를 프린스로 들긴 했지만 사실 프린스와 비슷한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는 그간 개인적으로 충분히 섭렵을 해서 별 효과가 없다 (판도라 라디오의 프린스 방송국은 맨날 마잭만 틀어줘... 스티브잡스 개객끼!!)

하지만 조니미첼, 레너드코헨 같은 포크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는 판도라 라디오를 통해 발굴한 게 적지 않다.

인공지능 짱짱!!

5. 유튜브 + 크롬캐스트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또 다른 조합이다. 유튜빙 (또는 유튜브질)을 하면서 도끼자루 썩어가는 줄 모르는 것 처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위험하긴 했지만 폰이나 아이패드로 유튜브를 본다는 것이 여간 귀찮은 데다가 조그만 화면으로 보는게 영 구려서 자주하지는 못하는 것이었으나 크롬캐스트를 구입하면서부터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핸드폰으로 편하게 검색, 그리고 커다란 티비화면으로 재생

스티브잡스 개객끼... (2)

날 완전 히끼코모리로 만들어놓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6. 나 + 사운드클라우드

가끔은 내가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사운드 클라우드에 녹음한 음원을 듣는다. 분명히 10년전보다는 내 실력이 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늘었지

7. Pub

이 모든 것이 지겨워지고 귀찮아지면 펍엘 나간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쯤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마셔야 한다. 눈은 미녀를 향하고 입은 맥주를 들이키고 있어도 귀는 펍에서 들려주는 음악을 듣고 있지.

나는 음악이 bgm으로 나오는 그 어떤 장소에서도 절대 음악을 뒷전(background)으로 두지 않는다. 마치 나비를 보면 잡으려고 애쓰는 고양이처럼... 나의 귀는 계속 음악을 향해 연신 손짓발짓점프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나는 1번부터 6번까지의 과정으로 속에 다 눌러담아놓은 것들을 밖으로 배설하기 위해 사람들을 부여잡고 “이 노래가 뭔지 알아? 이게 원래는...” 하면서 바지가랭이를 잡고 싶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다 쏟아버리면 내가 uncool한 사람처럼 보일까 염려하면서 자제하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그런 자제를 하면 할 수록 내가 얼마나 대책없는 덕후이고 잘난체 좋아하는 사람인가 하고 나 자신에게 시인하고 만다.

다음번에 뮤직펍에 갈때는 거울을 들고 가야하나보다.
내가 나 자신한테 프린스 얘기 실컷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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