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member meeting U here in the good ol' days



시드니 여행기 2편

1

시드니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프린스 티켓과 팔찌를 획득했다.
그리고 공연은 최고였다.

2

아니, 거짓말…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이번 여행기의 모든 것일수도 있다. 그외의 모든 행동, 생각, 이벤트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한달이 지난 지금 내가 어디서 무얼 어떻게 했는지 다 기억할 수도 없겠지만 기억해봐야 의미도 없을 것이다. 사실 내 기억력은 매우 좋기 때문에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나긴 한다. 단 다른 사람 말은 귓등으로 쳐먹는 못된 버릇때문에 그 이름이나 유래를 기억못하는 것일뿐.

내가 첫날 먹은 것이 킹크랩인지 새우인지 가재인지 알게 뭐야, 적어도 그곳이 달링하버라는 것은 기억하지. 아무튼 꾀 맛있었던 것은 확실해. 현지인이 알아서 주문해준 것이니까. 얼마나 멋진 말인가! “현지인”, “알아서”, “주문해준…” 이 모든 단어에 내가 신경쓰거나 고민해야할 요소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니까?

킹크랩을 먹기 전에 사실 오페라하우스로 달려갔다. 그 전에 에어비엔비로 예약한 숙소에 짐을 먼저 풀었고 샤워를 한번 했지. 물론 그 전에 에어비엔비로 예약한 집주인이 약속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아서 속을 태운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시드니 시내에 내 몸뚱아리가 있는 한 어떻게 해서든지 프린스의 공연을 볼수 있다라는 매우 높은 예측 (거의 기정사실이라 해도 뒤집을 수 없는) 덕분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날씨도 좋은데 그냥 노숙해도 상관은 없잖아? 홍콩에서 비행기를 놓칠 뻔 했던 순간에 비하면 이런 시련 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물론 홍콩에서도 비행기를 놓칠 수 있겠다라고 걱정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겠지만. 하지만 내 존재의 목적이 “걱정”인걸 어쩌겠어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자꾸 걱정이 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3

오페라하우스에서 다음날인 토요일 공연티켓을 2장을 거머쥐고 팔찌를 손목에 차고나니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항상 여행을 갈까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가기로 하고 막판까지 무거운 마음으로 있다가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는 순간에 “그래도 여행간다고 결정하길 잘했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엔 팔찌가 내 손목에 채워지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나의 결정에 대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기뻤다.

좋은 것들은 결국 흘러가버리니까, 좋은 것들은 아직 오기 전이 제일 좋다니깐

4

첫날 저녁엔 술을 아주 많이 마셨던 것 같다.

여행지에서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은 일분 일초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여행자로 하여금 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일 수 있겠지만 특별한 다른 목적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근심걱정으로 나약해진 내 몸뚱아리에 들이부어진 술 조금으로 나는 거의 기절하다 시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토요일

프린스 공연을 두번이나 보는 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정오쯤 겨우 일어났다. 이제 정말로 내가 해야할 것은 밥 제때 챙겨먹고 프린스 공연 보는 것밖에 없다.

투비컨티뉴드...

희봉

2016.03.27 22:04:57

거의 모든 변수가 사라지고 내가 해야할 것만 남은 상황이 되고나면 난 마치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프로그램같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일종의 기계적인 상태가 주는 안도감에 나를 집어넣는 것이 36년간 나 자신을 다뤄본 내가 깨달은 최고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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