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member meeting U here in the good ol' days



1

6시 50분, 7시 1분 알람을 그대로 지나치고 10시가 되어서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어제부터 앓고 있는 근육통과 몸살, 병원에서는 열도 나지 않고 목도 별로 부어있지 않다며 감기몸살이 아니라고 했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은 필요 이상의 불안감을 안겨 준다.

가령, 문득 내 수명이 다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난 오늘 할 일이 많으니까
적어도 오늘 죽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선 8년째 이용하고 있는 미용실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명을 2시간 연장하였다. 설마 저승사자가 찾아오더라도 헤어컷이 잘 되었는지는 보고 데려 가겠지.

헤어컷을 하고나서 이마트에 들러 햄버거 셋트를 시켰는데, 점원에게 물티슈를 하나 달라고 했더니 점원이 물티슈팩을 내주었다. 나는 맑은 콧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오늘은 왠지 죽지도 않을 뿐더러 매우 운이 좋을거 같다는 느낌마져 들었다. 그리고 바나나 한묶음을 사들고 서식처로 들어왔다.

우선 침구 셋트를 세탁하기로 했다. 매트리스 커버를 벗겨내는데 3시간이 걸렸고 세탁기에 밀어넣기까지 5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옷방 (방이 두개밖에 없는 이 집에서 하나의 방은 온전히 옷을 위한 방이 되어버렸다)에 가서 모든 서랍과 수납장을 열어 옷을 다 꺼낸 다음 다시 재 정리-정돈 하였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큐레이터였던 “헨리”가 죽기전에 자기 집에 있던 미술품을 리-어레인지 하였다지. 왜 갑자기 오늘 갑자기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제대로 정리하고 싶어졌던 것일까?

모든 이상 행동은 죽음의 다가옴과 연관되어 있는 것

모든 걸 다 마치고 나서 맥주 한캔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다 마시지도 못할테지
한모금 마시고 쇼파에 눕자마자 스스륵 잠이 들어버렸다.

2

이렇게 잠들어 스크루지의 유령이 간밤에 찾아온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같은 에고의 성을 쌓은채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사는 나를 바꿔주기 위해서 유령이 찾아와 나를 나의 과거로 데려간다면. (물론 방금 문풍지를 덕지덕지 붙여서 찬바람 한 올도 들어올 틈새가 없으므로 스크루지의 유령 또한 들어올 수 없겠지)

생각해보니 어느 시기를 가더라도 내 (과거의) 어글리한 모습에 유령의 목을 졸라 현재로 와달라고 닥달을 할게 뻔하다. 게다가 나는 여행을 싫어하지 않는가.

분명히 유령이 나의 과거 어느 곳으로 데려 가더라도 “지금이 훨 낫네, 적어도 지금 가르마가 더 예쁘니까”라면서 부정을 할 것이 자명하다.

썩 만족스럽지 않은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현재에 만족하는 것은 다소 역설적이다.

3

이 모든 것이 자각몽이라면?

내 나이 스물아홉 때 미카 내한 공연 몇시간전 커피빈 쇼파에서 잠시 졸면서 꾼 꿈이라면 말야

희봉

2015.12.25 02:12:48

2009년 겨울 압구정 커피빈…

여자친구와 함께 커피를 주문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때 커다란 모니터엔 영화 싱글맨 홍보 영상이 틀어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엔 그것이 싱글맨이라는 영화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발가벗은 남자가 물 속에 침전하는 감각적인 영상, 그리고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가 감독이라는 설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흘깃 쳐다보며 “저거 재미있겠군”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나갔는데 곧 그 영화에 1년을 묶이게 될 줄은 상상을 못했지

그 날 미카 공연을 보았고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내가 가진 (얼마 안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채 발가벗은 몸으로 끝없이 침전하는 상태로 서른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내 인생은 모든 것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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