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member meeting U here in the good ol' days



1. "길을 잃으면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되.."

"왜 여기에서 가게를 계속 하고 있는 거지?"
"엄마가 말씀하시길, 공원에서 길을 잃으면 그냥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라고 했어, 엄마가 찾으러 올 수 있게.."

남자는 자신을 떠난 여자를 자신의 가게에서 기다린다. 하지만 그 자리에 계속 있다 해도, 변하는 걸 막을 순 없다. 가끔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색이 바래지는 것처럼 옅어져버리니까. 비록 기억속에서 그 사람의 모습은 채도가 짙은 감각적인 영화같을지라도…

세월의 간극만큼 우리 사이의 공간을 벌려놓는다.


2. "내가 녹화한 것을 보곤 하지, 내가 놓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거든…"

찌질한 사람은 기록을 좋아한다.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반증이거든… 항상 과거속에 메여 산다. 그리고 항상 뒤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놓친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남자 주인공은 자기가 운영하는 까페테리아에 카메라를 설치해두었는데, 사실 도난방지용이 아니고 일기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비디오테잎을 돌려보면서 자기가 놓친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는다고..

나는 평생 일기를 써본적이 없다. 가끔씩 몰스킨 수첩에 더럽고 이상한 생각들의 파편을 끄적이곤 했는데… 한번도 내가 적어놓은 것을 다시 꺼내서 읽어본적이 없다. 20대 초반 받았던 연애편지는 30살이 넘어서야 다시 읽어볼 수 있었다. 그것도 딱 한번. 하지만 내가 가장 힘들고, 유치할때 끄적였던 메모들은 아직도 감히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이곳 희봉닷컴에 쓴 말들은 모두 거짓말이다. (지금 바로 이 문장을 포함해서) 설마 이렇고 공개적인 곳에 내가 모든 걸 다 털어놨을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겠지?


3. "그냥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

임금님귀가 당나귀귀라고 대나무숲에 가서 외쳐야 했던 것처럼, 누구나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를 풀어내야 한다. 2046에서도 그랬고, 지금 이 영화에서도 그랬고…

누구나(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이라고 써야 솔직할 것이다)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이 꼭 선택받은 사람이거나, 특별한 사람이라거나 그렇지 않아도 된다. 아니, 어쩌면 그냥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좋을 수도 있다. 속으론 나를 비난하거나 비웃더라도 겉으론 담담하게 보일테니까. 자기 일이 아니면 사실 별 일 아니잖아

내 이야기를 그냥 담담하게 들어주기만 해도 된다.

누군가에게 편지하고 싶다. 나 손글씨 정말 잘쓰는데..


4. "사랑이 바래지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

이 영화의 액자식 스토리라 할수 있는 "어니"와 "수 린"의 이야기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파리텍사스와 닮아있다. 나이많은 경찰관과 예쁘고 젊은 아내… 사랑이 식자 그들은 술에 의지했는데 술의 기운이 깨고나면 초라하고 바래진 자신의 관계를 냉정하게 직시해야 했다.

식어버린 사랑에 고되고 지루한 현실은 증오를 낳았다.

폭풍의언덕처럼..

이미 파국으로 치달아버린 관계는 한쪽의 희생과 부재를 통해서만 화해를 이룰 수 있다.


5. 끝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가끔은 그 아는 것들(혹은 집착하는 것들)로 인해서 제대로 된 감상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잘난체하려는 본능탓에 어느 장면 장면에서든지 내가 전에 보았던 그 무언가와 짜맞추려는 버릇이 막 피어나기 때문이다.

파리,텍사스
화양연화
2046

앞에 2개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뒤에꺼 하나는 좋아하려고 했으나 이해못하고 실패한 영화… 영화를 보다가 문득 "아 맞다, 이 영화 감독이 왕가위였지?"하면서 자각하게 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때 음악감독에 라이쿠더(빔벤더스 영화 음악감독)라는 이름을 보았을때 끝내 맞추지 못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춘 것처럼 묘한 감정도 들었다.

그냥 다 지우고 다시 한번 봐야겠다.

사족. 바에서 어니가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Otis Redding의 Try A Little Tenderness라는 노래가 나오는데, 첨엔 설마 했는데 이후에도 연달아 2번이 더 나왔다.

사족2. 그러고보니 화양연화에 나왔던 음악도 편곡되서 나온 것 같다.

사족3. 노라존스가 부르는거 말고, 여자포크 가수 노래가 하나 더 나왔는데 누구지.. 검색하기 귀찮다.

희봉

2012.09.21 01:28:00

6년은 참 긴 시간이다.

희봉

2012.09.21 01:28:17

그러고보니 내 게시판의 카테고리가 "일기장"이네.. 여기가 일기였어.. 일기...

박희봉

2012.09.21 01:31:58

Good Ol' Dayz로 되돌아가는건 불가능한 건가봐.. 그래서 트래비스도 떠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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