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member meeting U here in the good ol' days



여행을 가게 되면 정말 글을 쓸 시간이 많을거라 생각했다. 티비나 영화에서 보는.. 여유롭게 기차를 타고, 햇살을 가득 머금은 차창가에서 선글라스를 낀채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여유롭게 자판을 두드리는모습.. 하지만 여행 이야기를 하는 지금 8월 9일 금요일 오후 3시 반... 나는 여의도 국제금융센터 4층에 앉아있다.

여행은 시간과 돈의 제약 덕분에 그 사람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내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며, 귀찮은 걸 싫어하고, 새로운 사물이나 현상에 관심이 없으며 그런 것들을 소화할 능력이나 기력이 없는 지를...

내게 여행은 단지 그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나에 대한 것들을 재차 확인하고 돌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1

구상은 원대했다

사진을 많이 찍고..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음악을 모두 들은 다음.. 나의 인생에서 왜 이렇게 음악이 중요한 지를 감성적으로 풀어 쓴 다음... 책을 내든, 전자책을 출판하든 하는거야

하지만 여전히 나는 사진의 수평을 맞추는 것조차 하지 못하며, 내가 지난 20년간 수백번 수천번 들었던 음악들은 이제 모두 지겨워져 버렸으나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들을 여유공간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션을 수행하느라 정신이 팔려 여유롭게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지 (5살짜리 어린 아이처럼 나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 맥도날드에서 음식을 시켜먹는 것 등 모든 사소한 일조차 거대한 미션으로 다가왔다)

여행은 도대체 몇살쯤 먹으면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걸까?
아니지, 얼마쯤 있으면 여유롭게 할 수 있을까로 질문을 수정해야 하나?
아니, 체질이나 성격을 바꾸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난 영원히 여행부적합자 등급인 것이다.

2

나는 그 어떤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 이지만, 세상에 성스러운 것들을 사랑하며,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길 좋아한다. 나는 이 여행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의미 부여는 그 곳에서 실제로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보았는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것처럼...

2010년 가을 몸과 마음이 망가진 채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나는 중2병에 걸린 소녀와도 같은 심정으로 그곳에서 무언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다.

3

나는 음악이 음악 다웠고(적어도 따라부를 수 있는 멜로디가 존재하였으며, 아티스트들이 컴퓨터나 턴테이블이 아닌 악기를 들고 연주하던 시절), 음악을 소중하게 다뤘던 내 유년시절의 낭만을 떠올렸다. 어떤 곡들이 들어있는지 알지도 못한채, 미리 들어보지도 못한 그런 음악을 단지 친한 친구나 음반가게 아저씨들의 추천으로 앨범을 구입하던 그 시절...

mp3 시대의 저주는 음악 산업을 집어 삼켜버렸다. 유튜브에서 프리미어되는 뮤직비디오와 함께 디지털 싱글로 쏟아져 나오는 후크송 사이를 해집고 나는 다시 LP를 모으기 시작했다.

LP를 수집하기 시작하면서 20년전 내가 시디와 테잎을 구입할 때가 다시금 떠올랐다. 노래 한곡을 위해서 앨범을 사야했던 시절… 이건 마치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어떤 사람을 좋아할 때, 좋아했던 특징 또는 신체 일부분만을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음반을 고를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미지의 낭만이 존재했던 그 시절을 나는 추억한다.

시디를 사온 다음 스테레오 앞에 앉아서 부클릿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멍하니 앉아 음악을 듣던 그 기억.. 아마 시디를 사기 전에 mp3를 먼저 다운받고… 다른 일을 하면서 음악을 듣는 어른이 되어버린 이상, 그런 감동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 이미 한번 마음 속을 한번 크게 차지했던 것은 그 것이 자리를 비운다 할지라도 다른 것들로 채워질 수 없을 수 있다. 그러니 그 공간은 그것이 다시 돌아와 그 자리를 채우든.. 아니면 영원히 비어있든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기억이나 느낌을 되살리거나 비슷한 성질의 것으로 채우기 위해 나는 몸을 비행기에 실었다. (구지 여행이라 하지 않겠다, 글 제목을 여행기라 달아놓고 계속 여행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이 사태를 도저히 어떻게 매듭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4

몽트뢰에 도착한 첫날,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시간을 보낸 후 3일은 콘서트만을 위한 일정에 불과했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의 조식 부페에서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에너지를 충분히 비축한 다음 (그런데 어차피 내가 많이 먹질 못해서.. 끙..) 길을 나선다.

카메라 촬영을 못하게 하기로 악명 높은 프린스이기에, 가져간 카메라는 그냥 캐리어 안에 고히(?) 넣어두고, 아이폰과 지갑, 그리고 물티슈만을 크로스백에 넣은 채로 첫날 습득한 루트로 길을 걷는다.

첫날과 다를바가 없는 호숫가… 물은 물이요, 저 멀리 보이는 산은 그냥 산일 뿐이다. 나는 8시 공연에 늦지 않기 위해 걸어서 30분 거리인 공연장을 오전 11시에 내달린다. 11시 반쯤 되면 어김없이 프레디 머큐리 동상을 만난다. 종이 울리면 침을 흘렸던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는 프레디머큐리 동상을 보면 맥도날드가 떠올랐고, 맥도날드 셋트는 내가 그날 먹은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이다.

왜냐면 이미 줄을 서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화장실 외에 다른 곳을 갈 수 없으므로… 빠순이의 길은 멀고 험하고 배고프고 지친다.

오지를 탐험하는 마음으로 적게 먹고, 적게 싸고… 오래 버티어야 한다.


…(?)
…(!)

프린스 이 개새끼…

5

첫날 오전 9시에 도착했을때, 이미 2~30여명의 팬이 운집해있었고, 맨 앞줄에 앉아있는 프랑스 놈한테 너 몇시에 왔냐고 물어봤다.

"아이 돈 스피크 잉글리쉬"

프랑스 이 개새끼...

옆에 있는 놈이 대신 통역(?)을 해줬는데 새벽 6시 반에 나왔다고 했다. 아 시골에서 전교1등하다가 서울 올라와서 짓밟히는게 이런 기분일까? 도무지 이 덕후들을 이길 제간이 없어 보였다.

첫날은 오전 9시 반, 둘째날은 오후 3시… 그리고 셋째날은 오후2시 부터 공연장에서 줄을 서기 시작했고, 공연이 끝나면 밤 11시가 넘었다. 그러니 이제 내가 몽트뢰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누구나 금방 짐작할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새벽부터 진을 친 덕후들을 이길수 없었지만, 아마도 내가 그곳에서 가장 멀리 날아온 사람일 것이므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 첫날 스위스의 티비 방송국에서 나를 인터뷰했고, 그것이 둘째날 저녁에 공중파를 탄 모양이다. SNS상에서 뿐만 아니라, 다음날 공연장에 갔을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주고 반겨주었다.

하지만 난 우쭐대지 않았다.

나는 단지 So Excited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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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은 순수한 덕후들을 일시에 그렇게 많이 본다는 것은 프린스를 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공연장에서 내 주위에서 줄을 섰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린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것도 반가웠지만, 그 어느 누구도 겹치는 티셔츠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토마스 홉스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덕후의 덕후에 대한 투쟁"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게다가 3일 연속 공연에 돈을 많이 써야하는 덕후들로써 하룻밤 숙박비가 50만원에 육박하는 현지 물가를 도무지 견딜 수 없었는지 내가 묵었던 몽트뢰 유스 호스텔에 총집결해있는 것 처럼 보였다.

내가 묵었던 6인실도 6명 모두 프린스의 공연을 3일 연속 보러 온 사람들 뿐이었다. 아마 우리 방에 프린스 팬이 아닌 사람이 들어왔다면 팔 두개 달린 사람이 팔 한개 달린 병신 마을을 방문한 기분이었을 거다.

마지막날 조식 부페 때, 공연을 보면 하나씩 주는 팔찌를 벗지 않고 있어 삼색 팔찌를 완성한 궁극의 프린스 팬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너무나 반가워서 "봉쥬르"라고 인사했다. 물론 그들도 내 손목에 채워져있는 삼색 팔찌를 보고 이내 바로 활짝 웃으며 응대했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갈때 우리는 서로에게 "이번 공연이 내 생애 최고의 프린스 콘서트였어"라고 말해주었다. (비록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 너무나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신의 경지에 오른 팬들이므로 구차하게 이러저러한 설명없이 우리는 염화시중의 미소를 서로에게 지어주고는 헤어졌다.

7

몽트뢰를 떠나는 마지막날 몽트뢰 기차역에서도 나는 여전히 팔찌를 차고 있는 수많은 프린스 팬들을 목격할 수 있었으며 그들 역시 나를 알아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각자의 미션이 있는 스파이들이 서로를 알아보지만 내색하지 않는 것 같은 재밌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그 팔찌를 취리히 공항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길에 가위로 잘랐다.

베를린에서 레너드코헨의 공연을 보고 다시 취리히 공항으로 돌아와 한국으로 컴백하기 위해 공항에서 셔틀을 기다리는데, 프린스 티셔츠를 입은 외국인을 발견했다. 그 티셔츠는 몽트뢰 재즈페스티발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것이었으므로 프린스 공연을 보러 몽트뢰에 온 것이 틀림없는 것이었다.

그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너 몽트뢰 갔다 오는 길이니? 나도 프린스 공연 봤어.. 세번 다 봤어…"
"응 맞아…"
"넌 어디서 왔니?"
"응 나는 호주에서 왔어…"
"아 그렇구나 호주까지 안전한 여행 하렴…"
"응 너도"

10여초의 짧막한 대화를 나누고 우리는 어색하게 반대방향으로 흩어졌다. 비행기 탑승시간 까지 면세점을 유유자적하다 서로 2~3번 정도 다시 만났는데 서로 어색한듯 눈을 피했다.

덕후들은 이렇게 수줍다. (그리고 못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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