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member meeting U here in the good ol' days



출국일은 이번주 목요일이지만, 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너무나 뻔히 알고 있으므로 여행기를 미리 써두도록 한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날 "소설 박희봉 여행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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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가 조금 넘은 시각 눈을 떴다.

오늘 드디어 출국!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토마토 쥬스를 하나 갈아마시고 죄책감없이 카페인을 들이킨다. 그렇게 나의 육체와 정신을 강제로 부팅 시킨 후 수첩에 적힌 “준비물 목록”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아. 그래. 그리고 내 준비물 목록 또한 거짓말하지 않지. 이 준비물 목록에는 내가 필요한 것, 그리고 필요한 것이 없어지거나 망가질 것에 대비해서 추가로 가져가는 것, 그리고 나의 근심걱정을 덜어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티슈 들로 잔뜩 채워져 있다.

나는 항상 내 캐리어가 도중에 분실되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따라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나를 예쁘게 꾸며 줄 소중한 것을 고른다는 기쁨과 동시에 이 소중한 것을 분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차하는 것. 따라서 나는 될 수 있으면 최대한 캐리어를 기내에 들고 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모습이란 항상 애처롭기 그지없다. 겨우 10키로 짜리 캐리어를 족쇄처럼 낑낑대면서 질질 끌고다니는 근심걱정 99단의 숙명이란

이번엔 짐을 부치기로 결심했으므로 캐리어를 분실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속옷을 반반 나누어 절반은 백팩에 집어넣었다. 캐리어를 분실하는 경우 나는 3박4일 내내 츄리닝을 입을 것이지만 적어도 속옷만은 이틀에 한번 갈아입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마지막날까지 그리 걱정할 것은 없다. 속옷을 이틀째 입는 그 순간에 아마 난 이 참을 수 없는 찜찜함에 자살해버릴거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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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정오를 가르키자 난 집을 나섰다. 비행기 출발시각은 오후 7시 50분…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인천공항에 가는 도중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감안 해본다면 11시쯤 나왔어야 안심이 되는데 오늘은 약간의 방심을 내게 허용하기로 했다.

1시 반쯤 공항에 도착했다. (무얼 타고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알수가 없지)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쳤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멀어져가는 나의 캐리어를 보면서 하느님께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신청하고 짧게 기도했다. “신이시어, 내 캐리어를 굽어살피소서” 비록 낮은 확율이겠지만 불확실성이 생긴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좀먹는 일이다. 내 캐리어를 시드니 공항에서 온전히 볼 수 있을까?

비싸고 맛없는 공항식당의 밥을 먹고나서 면세점을 성의없이 둘러본다음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시계를 보니 3시… 적절한 도착시간이다. 4시간 50분만 기다리면 되잖아? 기다림의 지루함이 불확실성에 대한 강박보다는 백배 더 나으니까

탑승을 기다린 4시간 50분 동안 나는

1. 죄책감없이 아메리카노 마시기
2. 캐리어안에서 내 옷들이 지들 맘대로 막 구겨지지 않을까 걱정하기
3. 아무도 응답해주지 않는 투이타에 수다 떨기
4. 내 예약이 잘못되어 있지 않을까 끝없이 걱정하기
5. 내 캐리어를 무사히 찾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다시 한번 기도하기

그리고 비행기에 드디어 몸을 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통로좌석에 앉아 콘택트 렌즈를 빼고 골뱅이 안경을 쓴 다음, 음료와 식사를 받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으로 지나가는 스튜디어스만 말똥말똥 바라보면서 그렇게 앉아있다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이제 홍콩에 곧 도착하겠지.

희봉

2016.02.15 00:21:25

이것은 여행기의 일대 혁명이다.

희봉

2016.02.15 00:25:25

난 이대로 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근심걱정할 거라는건 너무나 확실하다. 이것이야 말로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여행에서 내게 허락된 유일한 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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