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good things, they say, never last



영화 <파리, 텍사스>를 보고
대구 유일의 종합잡지인 <빛>에다
원고지 열 매에 감상문을 쓴다.

지상에는 하늘의 별만큼 많은 이야기가 있고 그 숱한 이야기들은 흔히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 먼 옛날, 아주 살기 좋고 아름다운 마을에 누구와 누구가 살았더란다.
그러던 어느 날.....'
  빔 벤더스 감독의 84년도 칸느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파리, 텍사스(Paris, Texas) 역시 이런 이야기 방식의 너무나 보편적인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0년 전 옛날 트레비스(해리 . 딘 . 스탠톤)와 제인(나타샤 . 킨스키)은 텍사스 어느 해변 마을에서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젊고 예쁜 연하의 아내에 대하여 남편은 의처증에 가까운 불안과 의심을 나타낸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못 견뎌하고, 아이를 낳고부터는 더욱 남편에게 진절머리를 친다. 아내에게 아이는, 자신을 남편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어떤 짐과 같이 느껴진다. 아내는 밤마다 남편으로부터 도망하는 꿈을 꾼다.
다시 한 번,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원인모를 화재가 나고 가족은 뿔뿔히 흩어진다. 트레비스는 기억상실에 걸린 채 황야를 헤매이고 제인은 우주과학 산업의 본거지인 휴스턴의 어느 퍽킹 숍에서 매춘을 한다. 그리고 아이는 트레비스의 동생 부부를 부모로 알고 거기서 자란다.
스토리만 가지고 <파리, 텍사스>를 판단한다면, 이 영화는 너무나 평범한,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가정사에 불과하다. 사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드라마 게임> <금요극장> <사이코 드라마-당신> 등 우리나라 티브이물을 통해서 매주 볼 수 있을 만큼 흔한 것들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교묘히 전달하고자 하는 잘 은닉된 낙원상실의 주제에 대해서 주목했다.
트레비스는 아내와 아이를 잃은 후 4,5년간을 방황하며,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났고 사랑을 했으며 자신을 낳아 준 고향을 찾아 헤매인다.
트레비스의 고향은 텍사스주 어디엔가에 있는 파리이지만, 약간의 비약이 가능하다면, 서양인의 무의식 깊이 감추어져 있는 정신적 고향은 에덴동산이 아니지나 모르겠다. 눈을 뜨면 과수마다 열매가 열려 있고, 죄도 눈물도 없다는 바로 거기! 그러면 트레비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담과 이브였을까?
  인간은 곤경에 처하였을 때, 자신의 가장 좋았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인간은 자신의 희망을 미래에 걸 수 없을 때, 과거로 돌아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길 원한다.
파리, 텍사스가 단순한 지명이 아니고 곤경에 빠진 현대인이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좋았던 한 시절' 을 의미할 때, 파리, 텍사스라면 특정 지명은 무의미해진다. 그곳이 프랑스 파리면 어떻고 경북 길안이면 어떠랴. 어차피 파리, 텍사스는 에덴동산이거나 무릉도원이거나 유토피아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이 영화가 [잃어버린 지평선]처럼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영화인 줄 알았으나 차츰 나는 이 영화가 [1984년] [훌륭한 신세계] 따위의 현대 문학이 충분히 보여준 디스토피아를 다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인이 갈 수 있는 최후의 지점이 바로 여기라는 듯이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트레비스가 쓰러진 곳은 황폐한 황야이다. 그리고 그가 우편판매로 샀다는 한 뼘의 땅 역시 현대인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라도 하는 듯이 불모의 땅이다. 더욱 나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던 것은 영화 중에 나오는 광인의 외침이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낙원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은 그 곳에서 평화 아닌 것을 만나리라. 지상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으리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와 아들을 만나게 해놓은 채 홀로 떠나가는 트레비스의 구도적인 방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해준다. 과연 그는 파리를 찾아 갈 수 있을까?
그의 길을 나도 따라가고 싶다.

이렇게 맺음하곤,
[낙원을 상실한 현대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자비를......자비를......자비를......(운다)

From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1988, 민음사)

댓글 '1'

마늘

2007.04.04 13:03:19

글을 읽으니 다시한번 감동이 찾아오는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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